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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첼로의 제왕 루이지 보케리니(1743~1805)

by 어니스트-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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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케리니는 수많은 실내악을 비롯하여 13개의 첼로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하이든과 같이 궁정풍의 섬세하고 우아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하이든의 아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오늘은 첼로의 제왕 루이지 보케리니의 음악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8세기 고전음악에서 루이지 보케리니의 영역은 다소 특별한 지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첼로 연주자였던 보케리니는 당대 음악이 지닌 장대하고 엄격한 형식미가 넘쳐나는 스케일이 큰 음악에서 '실내악'이라는 작지만 독창적인 지대를 섭렵하는 '우아한 궁정풍'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 실내 기악곡들의 앙상블과 협주에 필요한 작곡을 주로 해 고전음악이 지니지 못한 '섬세하고 기교적이며 우아한'음악적 아름다움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보케리니 집안에는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도 보케리니는 성악과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겸했고 조카 살바토레 비가노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무용가 겸 안무가였습니다. 보케리니는 어린 나이에 그 지역 성당의 음악감독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습니다. 1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음악감독이며 유명한 첼로 연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코스탄치에게 배웠습니다. 

 

1757년 보케리니와 그의 아버지는 빈 황실 극장 관현악단의 연주자로 초빙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보케리니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주도 아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시작된 고전주의 음악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760년 두 번째 빈 여행에서 17세의 보케리니는 <2대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6개의 트리오>를 발표하여 작곡가로 데뷔했는데 이 작품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글루크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1764년 8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교회와 극장 관현악단에서 영구적인 지위를 얻었습니다. 작곡가로서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종교 행사와 그 밖의 축제 등에 참여했고 1765년경 루카에서 여러 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습니다. 1765년에는 롬바르디아에 있는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의 관현악단에도 있었는데 이 밀라노 출신 작곡가와의 공동 작업에서 2세의 보케리니는 현악 4중주의 새로운 기법인 '대화'양식을 터득했습니다. 첼로의 선율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대위적인 선율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는 새로 터득한 이 기법을 토스카나 출신의 대가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1766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루카를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만프레디의 동의를 얻어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브리용 드쥐 부인을 만나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6곡의 소나타>라는 훌륭한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양식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첼로 협주곡 6번 D장조>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첼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18세 때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루이스 안토니오 공의 눈에 들었던 인연으로 보케리니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보케리니는 실내악에 심취된 성향만큼이나 까다롭고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내성적인 빚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왕궁의 후원 아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국왕이 그의 새로운 3 중주곡의 한 악절이 마을에 들지 않아 고치도록 명령하자 자신의 작품을 국왕이 간섭한다며 내심 불쾌한 심사를 악보에 반영시켜 버렸습니다. 즉 국왕이 줄이라고 한 악절을 오히려 더 늘려 붙였던 것. 이일로 그는 왕궁에서 쫓겨나 후원자들의 지원에만 의지한 채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궁정 음악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보케리니는 평온한 가운데서 작품을 썼으며 귀족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에 씨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6곡의 현악 4중주도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마드리는 보케리니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클레멘티나 펠리코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798년 새로 즉위한 프로이센 국왕이 연금을 철회 하고 그를 후원하던 오수나의 여귀족도 파리로 가버리게 되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가중되는 재정적 압박감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1800년 뤼시앙이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공화국 대사로 부임해 가자 1801년부터 이전보다 더 극심한 가난 속에 빠져 1804년에는 세 아이들과 한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두 아내와 두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가난과 결핵으로 시달렸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4중주 90번 F장조>가 완성되자 이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해는 마드리드의 산 후스토 교회에 묻혔다가 1927년 고향 루카의 산타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많은 실내악곡을 작곡했는데 100여 곡이 넘는 두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두대의 첼로를 위한 현악 5중주, 12곡의 기타 5중주, 그리고 백여 곡의 현악 4중주, 현악 3중주와 소나타곡들이 있습니다. 보케리니의 작품은 프랑스 음악학자 이브 제라르에 의해 분류되어 1969년 런던에서 출판되었으며 "G"라는 작품 번호 기호가 붙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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