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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피아노의 아버지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

by 어니스트-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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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티는 연습곡과 소나타로 초기의 피아노 기교 발전에 공헌하여 '피아노의 아버지'라고 알려졌습니다. 처음으로 피아노가 등장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즈음에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습니다. 오늘은 피아노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치오 클레멘티의 음악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치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 음악이 '오페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유럽 세계에 널리 알린 '피아노의 신동'이자 피아노 작곡가였습니다. 세계적으로 피아노의 거장이랄 수 있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모두 클레멘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음을 우리가 피아노 하면 떠올리는 쇼팽이나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에 비해 그가 얼마나 과소평가된 인물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클래맨타는 175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은세공 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위에 소문이 나 9세에 오르가니스트 지위를 획득했고 12세에 오라토리오와 미사 등 복잡하고 스케일이 큰 곡들을 작곡하여 로마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14세에 영국에 건너가 더욱 연찬을 쌓아 21세에 런던에서 데뷔하여 명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날렸습니다. 1780년까지 런던에서 피아노 연주생활과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로도 활약하였습니다. 1774년에 비로소 런던으로 이주하여 자작곡을 발표하고 또한 연주자와 오페라 음악감독 등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피아가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그는 피아노의 특성들을 연구하여 작품에 잘 활용했습니다. 영국에서 그의 활동은 대성공을 거두어 1780년에는 파리, 스트라스부르크, 뮌헨, 빈 등지를 연이어 순회공연했으며 프랑스에서 왕비 앙투아네트를 위해 연주했고 1782년에는 빈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를 위해 연주했습니다. 

 

 피아노가 처음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즈음에 활동했던 클레멘티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또 피아노 교사로서 큰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이때 피아노 교육용으로 작곡하여 출판한 <그 라두스 아드 파르나숨>은 명작입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실내악곡도 남겼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피아노 소나타로 현재 64곡이 남아 있으며 그 곡들을 살펴보면 균형감, 간결하고 조화된 표현법, 순수하고 엄격한 형식 감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클레멘티는 피아노 기법 발전에 특별한 기여를 했고 미아노 연주 양식의 계보 형성에도 공헌했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J. 필드, I. 모셸레스, G. 마이어베어, JB. 크라머 등 우수한 음악가가 나왔습니다. 클레멘티의 음악은 피아노의 새로운 능력을 과시합니다. 그가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에 남긴 소재들은 매우 현대적이었으며 따라서 현대 피아노 주법을 창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피아노 교재로 사용되는 <소나티네>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피아노 레슨, 피아노 제조업, 악보 출판에 손을 대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1798년 파산 직전의 출판업자 겸 악기상인 존 롱맨과 동업해 당시 최고이던 브로드우드에 버금가는 피아노 회사로 키워냈고 영국 진출을 꿈꾸던 베토벤과 악보출판 계약을 맺어 <피아노 협주곡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코리올란 서곡>, <교향곡 제4번>, <라주모프스키 4중주>의 판권을 한꺼번에 사들였습니다. 대부분의 음악 천재가 경제적으로는 재능이 없었지만 클레멘티는 이재에도 밝은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돈을 버는 데에도 워낙 탁월했지만 러시아 연주 여행 도중 호텔 객실에서 직접 빨래를 할 정도로 구두쇠였다고 전해집니다. 클레멘티는 악보 발행과 피아노 제작을 하는 롱맨 앤드 브로 드립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 회사는 날로 번성했으며 훗날 회사명을 클레멘티 컴패니로 바꾸었습니다.

 

<녹턴>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필드는 클레멘티의 제자인데 스승과 함께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클레멘티사가 제작한 피아노의 우수성을 홍보했습니다. 클레멘티를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리게 된 유명한 일화는 바로 모차르트와의 피아노 경연이었습니다. 그는 1781년 29세 때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빈에서 4살 어린 25세의 모차르트와 피아노 경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1781년 크리스카스 이브,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의 궁전에서 세기의 음악 경연이 벌어졌습니다. 요셉 2세는 두 사람을 초청하면서 피아노 경연이 벌어질 거라고 예고하지 않았습니다. 궁전에는 왕족과 귀족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청중들이 두 사람의 경연을 지켜보기 위해 두 사람을 주목하자 그들은 당황했지만 곧 연주 경연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경연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클레멘티는 자신의 신작 소나타 b장조를 연주했고 뒷부분에서는 즉흥 연주도 선보였습니다. 청중들은 환호했습니다. 이어서 클레멘티는 당시 무척 인기 있던 곡 <토카타>를 연주했습니다. 클레멘티의 놀라운 테크닉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느린 템포의 즉흥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기교보다는 음악성을 들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아주 포퓰러 한 주제로 변주족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을 주제로 한 변주족, 단순한 선율이 다채로운 변주로 이어지자 모두 환호했습니다. 경연이 끝나자 황제는 무승부를 선언했습니다. 경연이 끝나자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연주를 "기계적이며 음악성이 없다."며 평가절하했지만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를 "훌륭한 연주였다."며 치켜세웠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인품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토벤은 클레멘티의 피아노 소나타를 "간결한 형식, 정신의 새로움 등 그만의 아름다운 패시지를 느낄 수 있다."며 극구 칭찬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연주를 그렇게 폄하하더니 자신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서곡에 클레멘티의 '소나타 내림 나장조'의 시작 부분을 도입하였습니다. 

 

모차르트의 살아생전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무치오 클레멘티, 어쩌면 그의 존재는 모차르트가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클레멘티는 놀라운 피아노의 대가였습니다. 클레멘티는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써 이후 유럽 음악계를 주도하는 훌륭한 제자들은 키워냈습니다. 클레멘티의 역사적 역할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기술을 확립한 점에 있습니다. 베토벤은 클레멘티의 소나타를 좋아하였으며 그로부터 간결하고 정확한 형식과 새로운 정신 등 배운 점이 많았다고 합니다. 

 

클레멘티를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 <그 라두스 아드 파르나슴>은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습곡이 드뷔시의 <어린이의 차지>의 첫 번째 장에서 '그 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라 편곡돼 인용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1832년 3월 10일 클레멘티는 런던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묘비명은 '피아노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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