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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오페라 음악의 아버지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

by 어니스트-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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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왜 저에게는 재능이 아닌 열정만 주신 것입니까!" 살리에리가 평생 자신을 괴롭힌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를 저주하면서 신을 향해 내뱉은 독백입니다. 하지만 그는 재능 없는 음악가가 아니라 베토벤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의 은사였으며 당대 성악 기법의 정점에서 서있었음을 의심한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은 오페라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살리에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서 쳄발로와 바이올린 등을 배웠는데 음악적 재능에 상당한 두각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뒤 가세가 몰락하여 이탈리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1766년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봉니 살리에리는 열네 살 때의 그를 눈여겨본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의 주선으로 오스트리아에 진출했습니다. 24세 때 오스트리아 궁정의 인정을 받아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됐으며 38세 때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 교육을 책임지는 '카펠 마이스터'가 됐습니다. 이것은 음악가로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직위입니다. 이른바 저주받은 맞수니 모차르트의 독살자로 알려진 살리에리는 아직까지도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는 작곡가입니다. 그는 당시 음악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같은 동시대의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물론이고 그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교육자로서의 역할입니다. 게다가 대다수의 후배 무명 음악가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던 살리에리는 무료로 교습을 해줬다고 합니다. 당시 음악계의 정정에 서 있는 인물이 이렇게 후배 양성에 큰 열의를 보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1784년 초연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오페라 <다나오스의 딸들>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초창기 글루크의 작품 다수가 그러했듯 살리에리 또한 당연히 고상하고 극적인 음의 언어를 추구했습니다. 이는 음악 미학에 끼친 루소의 영향이었습니다. 대혁명을 앞두고 있는 파리만큼 이런 종류의 오페라가 어울리는 곳도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그 도시만큼 비판적 예술에 기회를 제공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1792년 본에서 빈으로 이주한 뒤 당대의 유명 음악교사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바쁜 모차르트는 4개월간의 가르침만을 주었고 하이든도 런던으로 활돌 무대를 옮기는 바람에 레슨은 2년으로 끝났습니다. 이후 서른 살이 된 베토벤에게 살리에리는 1800년부터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하이든이 모두 알려주지 못한 대위법을 가르쳤습니다. 베토벤은 여러 편지와 방대한 분량의 대화록에서 '살리에리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슈베르트에게는 살리에리의 역할이 훨씬 컸습니다. 1804년 당시 일곱 살에 불과했던 프란트 슈베르트가 뛰어난 음악성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4년 뒤 빈의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주인공이 살리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살리에리는 피아노의 귀재였던 프란츠 리스트를 가르쳤고 그를 오스트리아 궁정 사회에 널리 소개했습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도 지도했으며 짧은 시간 가르쳤던 오페라 작곡가 마이어베어에게 '이탈리아에 가서 견문을 쌓아보라'는 조언을 주어 음악사의 한 장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살리에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주로 '모차르트를 해친 재능 없는 음악가'라는 데 그칩니다. 

 

 

 

모차르트는 몸의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자 죽기 직전 말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독을 먹인 것 아닌가?"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베토벤의 대화록에도 이런 얘기가 등장합니다. 살리에리는 분명 이런 의혹으로부터 큰 시달림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죽기 2년 전인 1823년 치매로 요양소에 실려간 그는 종종 혼잣말을 뇌까렸습니다.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어." 이 소식은 곧 병원 밖으로 흘러나갔습니다. 상태가 좋을 때 그는 명확히 혐의를 부인했지만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습니다. 모차르트 독살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살리에리가 죽고 나서 6년 만에 발표된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푸슈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푸슈킨은 오늘날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처럼 '천재를 질투하다 살인극을 펼치는 범재'로 살리에리를 그렸습니다.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67년 뒤 이 희곡을 오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시신을 살펴보았던 의사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식에 도리어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럼 내가 틀렸단 말이야? 모차르트는 틀림없는 자연사다. 그의 시체에는 독살의 흔적은 없었다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로는 1830년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1898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 사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외에도 피터 쉐퍼의 희곡이 원작인 <뮤지컬 모차르트>라는 오페라가 있습니다. 이 희곡을 바탕으로 체코의 영화감독 밀로스 포먼이 1984년에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1985년 작품상 등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2004년에는 담라우가 출연한 살리에리 오페라 <인정받은 유럽>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돼 음악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이는 TV로 중계됐습니다. 이어 세계의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홀에서 한층 많은 살리에리의 작품들이 공연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계와 애호가들이 살리에리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 살리에리는 궁정에서의 활약 및 교수활동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온화한 인품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플로리안 가스만의 호의로 좋은 교육을 받고 빈 궁정에 소개될 수 있었던 일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으며 이 때문에 대부분의 제자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여 그를 독살했다는 루머는 모차르트 사후 비엔나의 이태리계 음악가들과 독일계 음악가들 사이의 알력이 심화되면서 나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마탄의 사수>와 <무도에의 권유>로 유명한 카를로 마리아 베버가 있었는데 이는 베버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데다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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