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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

by 어니스트-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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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과 현악 4 중주곡의 형식을 완성시킨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음악적 특징은 멜로디가 신선하고 순수하며 온화하고 소박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질서와 통일성이 있어서 고전적인 전형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러한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732년 3월 31일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로라우에서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뒷날 하이든의 음악세계를 말할 때 대표적인 수식어로 '익살과 재치, 그리고 즉흥'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을 그가 태어난 4월 1일 '만우절'과 연관 짓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결혼 전 마을 지주의 요리사였습니다. 어린 하이든은 노래를 잘했으며 목소리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아이의 음악적 잠재력을 발견한 아버지는 그의 교육에 고심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사촌이자 근처 마을인 하인 부르크의 학교 교장이며 성가대 지휘자였던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하이든을 자신의 집에 두고 교육시킴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6세도 채 되지 않아 집을 떠난 하이든은 그 후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악기의 연주법을 익혔고 음악에 대한 유익한 기초 지식을 쌓았습니다. 하이든의 삶은 8세가 되면서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목소리와 노래 실력으로 주목을 받은 어린 하이든이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소년합창단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의 아이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749년 하이든에게 인생의 큰 좌절과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하이든은 변성기에 접어들어 노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17세의 하이든은 노래 대신 연주를 하거나 악보를 쓰거나 레슨을 하는 등 모든 것을 혼자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 음악가의 다락방에 기거하면서 음악에 관계된 일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등의 작품이나 중요한 음악 이론서들을 열심히 독학으로 연구했습니다.

 

1759년 하이든은 마침내 보헤미아로 갑니다. 이 곳에서 그는 벤첼 폰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이 되었는데 궁정악단은 16명 정도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8세기 전문 음악가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에 속해 악단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악단 살림을 책임지는 궁정악장은 늘 자신이 속한 가문의 백작과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갈등하고 협력하고 했습니다. 하이든도 당시 그가 속했던 귀족 집안의 궁정악장으로서 악단 운영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하이든은 그가 섬기던 백작이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과다한 소비를 줄이기 위해 악단 단원들을 해고했고 자신도 책임을 지고 궁정 악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러한 하이든의 책임 있는 행동에 비록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고용주였지만 그도 나름의 책임감을 느껴 하이든을 다른 궁정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하이든은 이 일로 인해 오히려 한발 더 승격해 안톤 폰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부악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766년 하이든은 열렬한 예술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 관련 악단 부악장으로 취임합니다. 하이든은 당시의 여느 궁정악장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개별적인 행사나 특별여행 등에 수행에 음악 연주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저녁 여흥을 기획하거나 기념일에 특별한 곡을 연주하거나 영주의 자녀에게 음악수업을 하거나 영주와 함께 곡을 연주하는 등 일반적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가 '헝가리의 베르사유'라 불리던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자신의 고향 저택에서 휴가를 보낼 때면 그는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고용인 제복을 입고 출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느 음악가와 달리 하이든은 자신이 '음악인'이라는 대단한 프라이드를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가의 열악한 입지를 개선하기 위해 한 첫 번째 행동은 하인들의 식탁에서 자기 자리가 궁정 관리 다음으로 지정된 것을 견디지 못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영주 앞에서 "언제 어디서나 악장은 가장 상석에 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주는 하이든이 자신 앞에서도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웃는 낯으로 그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악단을 위해 하이든은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 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했습니다. 하이든은 1706년 11월 가발 업자의 딸인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1768년 가을 하이든은 오페라 극장 개막을 위해 <약제사>를 작곡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상설 오페라단은 형성되지 않았고 임시로 구성된 가수들로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 역할을 포함해서 소프라노 셋과 테너 하나라는 색다른 편성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무렵 후작의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 바리톤 작품을 많이 창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의 음악 양식은 깊이가 더해졌고 더 복잡하고 표현력이 강해서 더욱 인상적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그로 인해 1760년대 후반부터 1770년대 초반까지를 '슈트름 운트 드랑크', 즉 '질풍노도'시기로 부르기도 합니다. 1773년에는 후작 궁정의 대표적인 음악인 교향곡의 대전환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해에 궁전을 좁혀 오페라 극장의 반대쪽에 인형 극장이 완성되어 하이든은 인형극으로 이루어진 오페라라는 색다른 장르에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1780년대의 하이든은 음악가로서는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과 파리 및 빈의 악보 출판업자들에 의해 수입이 발생했고 그 혜택은 시민들에게도 돌아갔습니다. 피아노 트리오, 피아노 소나타, 현악 4 중주곡이라는 시민의 가정 음악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작곡 주문이 밀려들었는데 주요 작품으로 <파리 교향곡>과 스페인의 카티스 대성당으로부터 위촉받은 <십자가 위의 일곱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1790년 2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같이 일했던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하이든은 흥행사 자르몽과 함께 빈을 떠나 영국 런던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약 5년 동안 런던과 빈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연주회에 출연하고 작품을 출판하는 일이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은 교향곡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13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외의 장르로는 현악 4 중주곡이나 10여 곡의 클라비어 트리오, 그리고 특히 세 곡의 클라비어 소나타 등이 이 시기에 쓰였습니다. 빈으로 돌아와 도시 중심가에 거처를 정한 하이든은 런던에서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빈 시민의 음악생활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영주의 사망 이후 자유를 얻은 하이든은 런던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서 더욱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는 집필한 <인간의 권리>에서 군주제의 종식을 요구했습니다. 제레미 벤담은 <윤리와 법률의 원칙에 대한 개론>에서 "국가는 다만 경제적 자유를 수호하는 기능만을 수반하고 있을 뿐이라고"주장했습니다. 1792년 4월 이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교정 상태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불안에 떨었고 군대 또한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국민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자 오스트리아 국왕의 고문 자우라우 백작은 국가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하이든은 <신이여, 프란츠 국왕을 보호하소서>라는 국가를 선보였습니다. 1797년 캄포포르미오에서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2년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평온한 기간에 하이든은 스웨덴 왕실 음악 아카데미 회원에 임명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1798년 하이든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이 작품은 신의 창조력에 대한 찬양을 통해 인류의 파괴적이고 호전적인 말살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1798년 4월 위대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상연되었습니다. <천지 창조>는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중의 최대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08년 몇 해 동안 계속 흥행에 성공한 <천지 창조>의 공연은 그를 기쁘게 했지만 피로가 쌓여 몸져눕게 된 뒤 병세는 급격하게 나빠져 마침내 5월 31일에 영면했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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