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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

by 어니스트-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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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양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바흐. 바로크 음악의 끝을 1750년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해에 바흐가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나긴 서양 음악사의 역사에서 음악성이나 업적, 명성 등에서 바흐에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은 모차르트와 베토벤밖에 없습니다. 바흐 가문은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 가문입니다. 세바스티안 바흐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가문의 중심지였던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할아버지와 그 두 아들들은 음악사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습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 기질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게도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바흐는 바로크 음악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 중 한 명입니다. 중부 독일 아이제나흐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열 상에 고아가 된 이후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그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아후 북독일 뤼네부르크의 미카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701년에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당시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거두인 얀 아담스 라인 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에 게오르크 뵘의 영향이 반영된 오르간 코랄 변주곡이나 프랑스 양식에 의한 클라비어의 모음곡 등이 작곡되었습니다.

 

1703년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하다가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의 성 보니파체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습니다. 바흐는 당대의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 테 후대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흐의 열정과 재능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북스테후데는 자신이 맡고 있던 뤼베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바흐에게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북스테후데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문제였는데 바흐는 결국 이 조건을 거부하고 뤼베크를 떠납니다. 

 

바흐는 자신의 6촌이자 한 살 아래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이미 연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스테후데는 헨델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바흐는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 독일에 있는 뮐하우젠으로 갔습니다. 뮐하우젠은 작은 도시로 음악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종교음악에 대한 열의를 다지면서 칸타타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습니다. 이제 음악 대가가 된 젊은 바흐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돌아왔으며 바이마르 왕실에서는 바흐의 능력을 높이 샀습니다. 1708년 7월 바흐의 나이 만 23세 때였습니다. 바이마르 시대는 그의 '오르간 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 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습니다.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 예배당의 음악가로 봉직하면서 협주곡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흐는 1708년 이곳의 오르간 연주자로 고용되었다가 1714년 악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영주였던 빌헬름 에른스트의 조카였던 요한 에른스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음악 영재였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면서 암스테르담에서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 협주곡 악보들을 대거 수집해 돌아왔습니다. 바흐는 에른스트가 가져온 이탈리아 협주곡의 악보들을 보면서 비발디나 다른 이탈리아의 유명한 협주곡 작곡가들의 악보를 연구하고 모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흐는 점점 협주곡 양식에 매료되어 숱한 노력 끝에 협주곡 양식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후 바흐는 비발디와 텔레만의 협주곡들을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독주곡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바흐는 20대 초반에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이 독일 전체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름 명성이 높아진 바흐는 바이마르보다 좀 더 큰 곳에서 일하기를 원해 틈이 날 때마다 마이닝겐,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헨델의 탄생지인 할레 등으로 구직 여행을 다녔습니다.

 

할레 사람들은 그의 오르간 연주와 음악에 감탄해서 바흐를 오르가니스트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처우조건이 맞지 않아 결렬되었습니다. 1714년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바흐를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임명했는데 승진 조건은 매달 1곡씩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는 것이었습니다. 힘든 조건이었지만 이 시기에 그는 <울며 탄식하고 근심하며> 칸타타, 옆동네 영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냥> 칸타타, 그리고 <오라, 성령이여, 주 하느님이여>등 유명한 코랄을 주제로 한 오르간 곡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바로크 협주곡뿐 아니라 바로크 기악음악을 통틀어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 중하 나입니다. 총 여섯 곡의 협주곡으로 이루어진 <부란덴부르크 협주곡>에서는 화려한 필치로 당시의 여러 악기들이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또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는 이탈리아식의 생기발랄함과 독일식 절제의 미학 같은 국가적 양식들이 용해되어 있고 폴리포니 음악과 호모포니 음악이 자유롭게 교체되며 다양한 춤곡들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풍요로운 느낌이 충만 합니다. '브란덴부르크'라는 이름은 바흐가 이 작품들을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폰 브란덴부르크 공의 의뢰로 작곡했고 그에게 헌정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흐는 비발디를 비롯하여 코렐리, 토렐리 등의 기악 협주곡에 크게 주목하여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이후 바흐의 작품에는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의 영향이 크게 느껴집니다. 1716년 말에 궁정악장 사무엘 드레제가 죽었습니다. 바이마르 영주는 섭섭하게도 바흐를 제쳐두고 텔레만에게 후임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텔레만에게 거절당하자 별 경력도 없는 사무엘 드레제의 아들 요한 드레제에게 악장을 맡여 버렸습니다. 노쇠한 궁정악장을 대신해서 사실상 악장의 대리 격이었던 바흐는 크게 상심하여 바이마르를 떠나 쾨텐의 영주이자 엄청난 음악 애호가였던 레오폴드 대공의 궁정 악단장이 됩니다. 1718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습니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인 후대를 베풀었습니다.

 

쾨텐의 궁정은 칼배파여서 교회 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습니다. 쾨텐 궁정에서 바흐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기악곡의 대다수를 작곡하였습니다.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습니다. 바흐는 모처럼 행복한 음악생활을 하게 된 쾨텐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6년 만에 라이프치히로 옮기게 됩니다. 바흐가 쾨텐을 떠난 이유는 그간 교회 음악에 대한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쾨텐의 영주가 결혼한 후 음악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1722년 6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요한 쿠나우의 사망으로 시 참사회는 그 후임을 찾았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자 함부르크 다섯 주교회 감독이었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첫 번째로 물망에 올랐으나 그는 함부르크를 떠날 생각이 없다며 라이프치히의 제안을 고사했습니다. 이러 두 번째 후보였던 다름슈타트 공국의 궁정악장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의 고사로 인해 바흐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며 1723년 5월 중순에 라이프치히 교회의 칸토르 직 취임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바흐에게 추천했던 굴욕의 취업입니다. 그러나 바흐는 이 라이프치히 칸토르에 취임한 후 평생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자 종교 음악의 절정을 이룬 <마태 수난곡>등 160여 곡의 교회 칸타타 작품들이 이곳에서 작곡되었으며 1730년 정도를 기점으로 교회 음악 작곡 빈도는 급격하게 줄었다고 합니다.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훗날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로 칭송받는 바흐이지만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으며 사망한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1802년 독일의 음악사 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후 50여 년 만에 전 유럽적 바흐 열풍이 몰아닥쳤습니다. 그 후 바흐의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더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었던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면서 다시 한번 바흐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은 1889년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한 것이며 고금의 첼로곡 중 최고봉의 하나로 꼽히는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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