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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악마의 바이올린 주세페 타르티니(1692~1770)

by 어니스트-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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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타르티니의 왼손은 선천적으로 육손이었다." 타르티니의 테크닉은 충격적일 정도로 뛰어나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타르티니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바이올린의 신이었습니다. 오늘은 악마의 바이올린이라 불리는 주세페 타르티니의 음악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타르티니는 169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 이스트리아의 피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인 안토니오 타르티니는 피렌체의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타르티니는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부모의 소망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프란시스코 수도사가 되기 위해 1708년 북부 이탈리아의 파도바로 갑니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1709년 17세의 나이로 파도바 대학의 법학부에 등록했을 뿐만 아니라 곧 음악과 펜싱에 더 열중하여 뛰어난 검객으로 이탈리아에서 유명해져 있었습니다. 

 

"타르티니를 체포하라!" 1710년 타르티니는 당시 파도바의 조르지오 코르나로 대공이자 추기경의 보호를 받고있던 자신의 여제자인 엘리자베타 프레 마조레와 비밀 결혼을 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결국 수도승으로 변장하여 파도바를 탈출한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수도원에 은둔했습니다. 이 수도원에서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신부에게 음악을 배웁니다. 그는 그곳에서 빼어난 바이올린 연주로 사람들의 관심을 샀고 1715년 결국 조르지오 코르나로 대공과 교회 당국의 마음을 움직여 파도바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 되돌아오도록 허락받습니다. 

 

1715년에 타르티니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최초 소유자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1716년 그는 파도바로 돌아온 직후 우연히 베네치아의 한 연주회에서 자신의 기교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고독한 유배생활을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프렌체스코 마리아 베라치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베라치니의 연주를 들은 그는 연주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장기간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베네치아와 안코나를 거쳐 마르케 지방에서 은둔한 채 오로지 바이올린 연주 연마와 바이올린 음향 연구에 몰두한 타르티니는 1720년대에 이르러서야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1721년 파도바로 되돌아온 그는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 겸 음악감독에 임명되어 예배당 합주 및 합창단을 지도하였습니다. 특히 대성당의 음악가 직위를 그 어떤 경연이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맡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누구나 인정하는 상당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726년에 타르티니 음악학교를 설립한 그는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을 전문으로 음악가의 체계적인 양성에 나섰는데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국제적인 학교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의 교육적인 목표는 현악 연주에서의 표현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점차적으로 그는 바이올린 음악의 조화와 음향적 이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1750년대에는 이론을 체계화하여 다양한 논문을 집필하였습니다. 1765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오케스트라를 그만두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파도바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연주와 교육 및 작곡을 통해서 바이올린의 기교와 레퍼토리를 만들어내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740년부터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연주여행을 했습니다. 1755년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그는 뇌졸중으로 1770년 77세를 일기로 파도바에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1713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른바 <악마의 트릴로>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아시시에서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의 연구에 심혈을 다하고 있을 무렵 한밤의 꿈에 악마가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들은 그가 잠에서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그 소나타를 악보에 기록했는데 바로 그것이 <악마의 트릴로>입니다. 이 제목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최후의 제3악장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트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꿈속에서 악마에게 배웠다고 하여 작곡가 자신에 의하여 붙여진 곡명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인 1798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는데 언젠가부터 <악마의 트릴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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