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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프랑스의 음악이론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

by 어니스트-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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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필리프 라모는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이론가입니다.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 발레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음악이론가로서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오늘은 프랑스의 음악이론가인 장 필리프 라모의 음악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장 필리프 라모는 다종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접하고 예수회 수사들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가족들은 라모에게 음악은 취미생활로 즐길 것을 원했으나 본인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는 18세 때 이탈리라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1702년 아비뇽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다가 후에는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의 음악감독이 됩니다.  1706년부터는 파리에 본격적으로 정착했고 같은 해에 그의 첫 클라브생 작품집을 출판했습니다. 그 표지를 보면 라모는 동시에 예수회 대학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도 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종에서 태어나 여러 지방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라모는 40세가 되어서야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음악가보다는 근대 기능 화성법의 원리를 최초로 규명한 책 <화성 이론>의 저자로 먼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음악교육자로 또 오르간 연주자로서 유명해져서 프랑스 궁정으로부터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을 받아 작위도 받고 왕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는 등 부유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라모는 늦게 성공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당시로서는 고령인 80세가 넘도록 장수했습니다.

 

라모가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을 1733년 그의 최초의 오페라인 <이폴리트와 아리시>가 초연된 때였습니다. 이때 그는 이미 50세였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열정이 식을 줄 몰랐고 그 열정의 기세를 몰아 오페라 발레 <멋쟁이 인도인들>로 주목할만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 라모의 대표 오페라가 된 <카스토르와 폴뤼>를 작곡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개성이 강한 실험성 짙은 오페라를 차례로 쏟아냈습니다. 

 

라모의 오페라는 전체적으로 서정비극의 구성으로 이루어졌으면서도 곡 곳곳에 극적인 면을 부각하는 예술 장치를 많이 배치해 놓았습니다. 라모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다양한 예술장르의 도입, 특히 합창과 춤을 극의 진행상 결정적 부분에서 인상적인 역할을 하도록 배치하는 것이나 서곡, 반주곡 등 관현악곡의 기악 서법 등은 당시 오페라 작곡가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그만의 독창적인 구성법이었습니다. 

 

시대를 한 발 앞서간 그의 실험적인 오페라들은 당대 비평가들의 신경을 건드리며 처음부터 혹평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첫 오페라인 <이폴리트와 아리시>가 상연되자마자 프랑스 오페라의 또 하나의 별인 륄리를 지지하는 륄리파가 라모의 오페라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오페라에서 벗어나 구성이 복잡하고 난해해 마치 시끄러운 소극을 보는 듯하다는 실랄한 비난을 합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새로운 실험이 빛나는 라모의 오페라를 지지하는 애호가들과 륄리파 애호가들이 둘로 나뉘어 수년간의 논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들의 논쟁은 십여 년 후인 1752년에 다시 불이 붙은 유명한 '부퐁 논쟁'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부퐁 논쟁은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의 두 번째 파리 공연 이후 일어났습니다.

 

라모는 바흐와 더불어 12 평균율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대가였습니다.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옹호자로서의 그는 륄리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율 주의, 성악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후일의 글루크와 바그너의 오페라 개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곡가 라모는 그의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그나마 부퐁 논쟁의 선봉자로서 또는 그 유명한 화성법 책의 저자로서 라모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있겠지만 작곡가로서의 라모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라모의 작품은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대 라모의 위상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카스토르와 폴뤼>는 1737년과 1785년 사이에만 파리에서 254번이나 상연되었습니다. 당시 한 영국인이 남긴 기록이 당시 라모에  대한 대중의 재미있는 반응을 잘 설명해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라모의 끔찍한 작품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그의 오페라 좌석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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