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골레시는 종종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로 불렸습니다.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천재성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모차르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순, 경쾌, 우아함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오늘은 요절한 천재 작곡가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페르골레시는 1710년 이탈리아의 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725년 나폴리에 가서 다른 학생들과 가에타노 그레코에게 공부하기 전까지 예시에서 프란체스코 산티니 아래에서 음악을 공부하였습니다. 1726년부터 나폴리의 포베리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1732년 나폴리 스티글리리아노 공의 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나폴리의 오페라 부파 <연애하는 수도사>와 미사곡 1곡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33년 오페라 세리아 <콧대 높은 죄수>가 공연되었으나 정작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작품의 막간에 삽입된 <마님이 된 하녀>였습니다. <마님이 된 하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752년 파리에서 상연되자, 장 밥티스트 륄리와 장 필리프 라모가 지지하는 진지한 프랑스 오페라와 새로운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 지지자 사이의 부퐁 논쟁(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의 우열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부퐁 논쟁이란 프랑스 궁정 오페라가 우월하냐,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가 더 낫냐는 논쟁이었으며 이로 인해 왕과 왕비의 입장이 갈렸고 궁정 신하와 지식인들 입장이 정반대로 갈렸습니다.
페르골레시의 작품 연주가 몰고 온 논쟁은 진보와 보수파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국왕과 퐁파두르 부인을 비롯한 귀족들은 프랑스 음악을, 왕후와 장 자크 루소, 달 라베르,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파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월성을 옹호했습니다. 2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 싸움은 1754년 이탈리아 측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부퐁 논쟁은 역설적으로 프랑스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의 탄생에 결정적인 자국이 되었고 이 사건 이후 소개된 페르골레시의 최후의 유작인 <스타바르 마테르>는 프랑스에서 거의 신격화되었습니다.
1736년 페르골레시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나폴리를 떠나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의 카푸킨 수도원으로 요양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작품인 <스타바트 마테르>를 완성했습니다.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은 대부분 사후에 이루어졌으며 1752년 파리에서 공연돼 이후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이로 인해 부퐁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페르골레시의 작품을 위조하려는 표절 음악가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연유로 페르골레시의 것으로 알려졌던 작품들의 신빙성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좀먹어 들어가는 폐를 웅크려 잡고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간 최후의 유작 <스타바트 마테르>는 음악사에 남겨진 무수한 <스타바트 마테르> 곡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윽한 비애를 농축시킨 이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페르골레시의 마지막 숨결도 다해 1736년 3월 16일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에서 26세의 삶을 거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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