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는 카스트라토의 전성기였습니다. 카스트라토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이나 고아원 출신인데 반해 파리넬리는 귀족 가문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의 감성을 훔쳐냈습니다. 오늘은 카스트라토의 전설인 파리넬리의 음악적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던 전설의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는 본명이 카를로 브로스키였습니다. 자신의 카스트라토 성장기를 담은 영화 <파리넬리>에서 그는 카스트라토로서의 비애와 사랑,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아리아의 세계를 눈부시게 펼치고 있습니다. 파리넬리도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카스트라토 들은 예술계에서 성공하게 되면 일약 대중스타로 떠오르며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국가의 정치 외교적 역할까지 수행하는 놀라운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물론 스타의 전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카스트라토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습니다.
파리넬리는 1705년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풀리아 주 안드리아에서 작곡가 살바 토레 브로스키와 나폴리 사람이었던 카테리나 베레세 사이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 리카르도 브로스키도 아버지를 따라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파리넬리는 12살 때 아버지에 의해 생식기를 거세당했으며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의 제자가 됩니다. 그 후 놀라운 속도로 그의 노래 실력이 향상되었으며 이때 메타스타시오를 만나게 됩니다. 메타스타시오와 파리넬리는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으며 그의 예명 파리넬리는 그의 후원자였던 파리나 형제의 성을 본떠 만드었다고 합니다.
1724년 파리넬리는 빈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나폴리 등 여러 곳을 다녔으며 1726년 파르마와 밀라노를 방문했을 때 플루티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요아킴 콴츠도 그에 대해 호의를 표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힘이 있었으며 풍부한 기교와 유연한 장식음 등으로 많은 찬사를 얻었다고 합니다.
1734년 포르포라와 같이 런던으로 왔던 파리넬리는 런던에서 카스트라토인 세네지오를 만나게 됩니다. 세네지노는 헨델과 공연을 하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둘은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헨델과 파리넬리의 사이는 서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헨델은 파리넬리를 '노래하는 기계'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37년 파리넬리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부인 엘리자베타의 초청을 받습니다. 엘리자베타는 펠리페 5세의 우울증 치료를 부탁하였으며 파리넬리는 펠리페 5세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4곡의 노래를 반복하여 불렀으며 펠리페 5세는 그의 노래를 듣고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바르바라 왕비와 페르난도 6세는 파리넬리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바르바라 왕비는 종종 파리넬리가 노래할 때 하프시코드로 반주를 하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파리넬리는 결코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지 않았고 모든 뇌물을 거절하였습니다.
서양 음악에서 카스트라토의 전성기는 1650년부터 1750년까지의 근 100년의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그 후로도 간간히 18세기 말에도 여전히 카스트라토를 위한 음악들이 작곡되기는 했는데 유명한 '알렐루야'가 들어있는 모차르트의 모테트 <춤추라, 기뻐하라>는 모차르트가 카스트라토였던 자신의 친구 라우치니를 위해 작곡한 것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카스트라토의 전통이 깨지기 시작했고 특히 나폴레옹은 나폴리를 점령한 후 많은 카스트라토를 배출하던 나폴리 음악원에 거세된 소년들이 입학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작곡된 로시니와 마이어베어의 오페라에도 여전히 카스트라토의 역할이 나옵니다. 1750년 파리넬리에게 칼라트라바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파리넬리는 1759년까지 스페인에 머물면서 흥행사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공적인 활동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나 1759년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한 카를로스 3세는 그에게 연금을 후하게 주면서 스페인을 떠나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에 카를로스 3세의 모후가 천거했던 음악가의 자리를 파리넬리가 차지했던 전력 때문이었습니다. 파리넬리는 마드리드를 떠나서 30여 년 전에 구입해 두었던 볼로냐의 별정에 정착했습니다. 파리넬리는 18세기를 풍미했던 카스트라토였습니다. 풍부한 성량과 기교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의 연기력은 풍부한 성량에 어울리지 않게 좋지 않았다고 하며 화려한 무대의상과 장식으로 인해 세간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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