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악풍은 고전파의 초기 양식에 가까운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낭만파에서 현대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두루 음악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은 공주의 암악가로 불리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음악적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매우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해 당대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교사들이었던 가에타노 그레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베르나르도 마스 키니 등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과 작곡, 이론, 화성법, 대위법을 배운 뒤 1701년에 나폴리 궁정 예배당 전속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습니다. 1704년에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아들은 베네치아로 보내 음악적인 경험을 더 쌓도록 했는데 이 시기 동안 초기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을 작곡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활동 양상이나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1709년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망명 왕실의 여왕 마리 카시미르의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 시기 동안 하프시코드 명연주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심지어 독일 출신의 동년배 라이벌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의 연주 대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연주 대경은 그냥 높으신 분들의 여흥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남았습니다.
로마 부임기에는 건반 소나타 외에도 여왕이 운영하던 사설 극장을 위해 여려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1715년부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가대장을 역임했습니다. 1719년 포르투갈 왕실에서 초빙 제의를 받고 성가대장을 사임한 뒤 리스본에서 당시 포르투갈 공주였던 마리아 막달레나 바르바라의 전속 음악교사 겸 쳄발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막 열상이 된 어린 마리아 바르바르 공주는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리스본에 오기 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미 50여 곡의 건반악기 작품을 작곡해 두었지만 공주의 연습을 위해 작품을 순식간에 소진해버렸고 결국 도메니코는 허겁지겁 작품을 만들어 다음 레슨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공주의 음악수업을 위해 작곡한 작품은 단악장 구성의 소나타로 대부분 5분 이내의 짧은 작품들이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마리아 바르바르 공주, 그들의 사제관계는 1727년까지 지속됩니다. 그러나 도메니코는 아버지 알레산드로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포르투갈을 떠나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서 일하다가 첫 아내 마리아 카테리나 젠 칠리와 결혼했습니다. 1729년에는 다시 스페인의 세비야로 건너와 그곳에서 4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그 지방의 민속 춤곡인 플라밍고를 비롯한 스페인 전통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연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향했습니다. 한때 자신의 제자이자 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와 결혼한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가 스승을 불렀던 것입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왕실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후 평생 동안 직책을 유임하면서 수백 편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들을 창작했습니다. 1742년에 첫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스페인 여성인 아나스타시아 마하르티 히메네스와 재혼해 여생을 보냈고 당대 유명한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와 친교를 맺고 그를 위해 성악 작품들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1757년에 마드리드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산 노르베르토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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