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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만하임 악파의 거장 크리스티안 카나비히(1731~1798)

by 어니스트-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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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만하임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교향곡, 실내악곡, 발레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한 크리스티안 카나비히는 바로크에서 빈 고전파로의 가교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만하임악파의 거장으로 불리는 크리스티안 카나비히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8세기 독일은 서양 음악의 주도적인 음악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전 세대의 유럽 음악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각축전으로 전개돼 화려한 오케스트라와 드라마틱한 오페라로 성가를 이뤘다면 18세기 들어 서서히 그 중심축이 독일로 옮겨지게 되고 그 핵심은 실내악의 주악기인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주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18세기 독일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인 카나비히의 활약은 단연 돋보이는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카나비히는 만하임악파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1731년 독일의 만하임에서 작곡가이자 플루트 연주자였던 마르틴 프리드리히 카나비히의 만하임에서 작곡가이자 플루트 연주자였던 마르틴 프리드리히 카나비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만하임의 일인자로 등극하게 된 것은 바로 1758년 슈타미츠의 뒤를 이어 만하임의 궁정악단 지휘자가 되고부터였습니다. 그는 요한 슈타미츠 밑에서 공부한 후 1746~1747년까지 만하임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 1758년 슈타미츠의 뒤를 이어 만하임의 궁정악단 지휘자가 되었으며 1774년에는 궁정악장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만하임 궁정악단은 유럽에서 제일가는 오케스트라로 독일 음악 전성기의 새로운 획을 긋게 됩니다. 당시 만하임 궁정악단은 카나비히의 섬세하고도 박력 있는 지휘로 유럽에서 가장 실력 있는 오케스트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지도한 효과적인 크레셴도와 디 크레션도 연주법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카나비히와 같은 시대의 여타 작곡가가 그렇듯 현재에는 이렇다 할 명성도 연주되는 작품도 없는 상황입니다. 

 

카나비히는 모차르트와도 각별한 친분이 있었는데 1766년 파리에서 처음 모차르트를 만났습니다. 모차르트는 카나비히가 만하임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시절에 만하임을 방문하여 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효과에 매료됩니다. 특히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클라리넷의 소리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듯합니다. 1777년 21세의 젊은 모차르트는 만하임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방문하였다가 카나비히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카나비히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1778년 카나비히의 딸이었던 로사를 위해 <피아노 소나타 K.309>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나비히는 그가 보았던 가장 훌륭한 지휘자이며 단원들에게 신망이 높을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극구 칭찬하고 있습니다. 원래 동료 음악가의 칭찬에 인색한 모차르트가 이렇게 찬사를 바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는데 카나비히가 얼마나 덕망 있는 사람됨을 가지고 있으면서 뛰어난 지휘자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카나비히의 교향곡은 이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에 못지않은 기교와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교향곡들은 같은 시기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향곡 <파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구성적 유사성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1798년 아들인 카를 카나비히를 방문하는 동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나비히는 교향곡, 실내악곡, 발레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바로크에서 빈 고전파로 넘어가는 유럽 근대음악의 가교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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