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음악 이야기

음악의 악성 루트비하 판 베토벤(1770~1827)

by 어니스트- 2022. 8. 31.
반응형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삶의 철학을 음악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 그는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의 문을 연 악성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음악의 악성 루트비하 판 베토벤의 음악 일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하 판 베토벤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으로까지 승진하였습니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습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안느 모두 7남매를 낳았습니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오늘날 우리들이 '악성'이라고 칭송하는 루트비하 판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루트비하는 피아노를 배우면서 여러 번 구타당했지만 귀족과 여러 대중이 모여드는 살롱에서는 애지 중지 대접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롱에서 본래 일곱 살인 그를 여섯 살짜리 신동이라며 당당하게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국왕 앞에서 건반악기 데뷔 연주회를 성공리에 마치며 '궁정 전체에 충만한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베토벤이 이처럼 반쯤은 구경거리를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귀족을 미워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는 시중을 들고 대접을 하는 반면 누구는 지배를 하고 대접을 받는 권력의 역학구조가 어린 나이에도 그의 눈에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1781년 이후 루트비히는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게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추종자로서 음악을 통해 자연스러운 소박함과 간결함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궁정 사회의 고답적인 예술 양식에 대항하고 새로운 자연관을 추구하는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주장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네페가 제자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습니다. 베토벤은 스승이 가진 이상에 열광했습니다. 1784년 그는 1백5십 굴덴의 봉급을 받는 궁정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를 더 많은 공부에 할애하였고 특히 실내악 장르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1792년 런던에서 빈으로 향하는 도중 휴식차 쾰른에 머물던 하이든은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는 놀랍게도 이 젊은 동지를 제자를 받아들였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위해 여비와 학비를 모아서 보태주었습니다. 그중에는 추천장을 적어준 페르디난트 발트슈타인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빈에서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는 사이 그의 집안은 총체적인 난국에 봉착했습니다. 아버지는 사망했고 동생들은 친구들에게 맡겨졌으며 라인 강이 프랑스령이 됨에 따라 선제후는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빈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상황들에 대해 베토벤은 아무런 의견 표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피부에 와닿기에는 빈이라는 도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선제후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자신이 다시 부를 때까지' 빈에 체류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으로 떠나자 베토벤은 요한 알브레히트 베르거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이그 나프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은 1784년에 본 궁정의 교회 정식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이래 1789년에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로 가족을 부양하였습니다. 교향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됐는데 그는 평생 친구이자 재정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족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생계비를 벌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판 슈비텐 남작과 리히노프스키 영주와 안면을 텄고 그들은 초창기 베토벤의 예술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궁정을 둘러싼 혼란의 와중에 선제후는 자신의 궁정 음악가를 말없이 해방시켜 준 듯싶습니다. 베토벤은 이후 그대로 빈에 남았습니다. 우선 그는 피아노와 실내악 연주가로 명성을 떨치며 후견인들이 주최하는 살롱에서 연주했습니다. 179년 내내 작곡에 매달린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등의 레퍼토리로 공연에 데뷔하였습니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습니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베토벤은 청각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 세상에 태어난 이후 그를 가장 오랫동안 괴롭혔던 질병은 오히려 매독으로 인한 성병이었으며 이 때문에 청각 장애나 운동성 장애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1802년 그는 이미 '죽음을 때 이른 친구로 맞이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빈 근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작성된 유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오, 그대 사람들이여, 나를 증오심에 불타 완고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이로 알고 있는 그대들이여, 이는 내게 얼마나 부당한 처사인가, 나의 마음과 나의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호의를 가진 부드러운 감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6년째 난치병에 걸려있는 나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오래도록 이병에 시달려야 하는 선고를 받은 나의 처지를." 1827년 3월 26일에 베토벤은 친구들 및 지인, 제자와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유언은 "유감인 걸. 너무 늦었어."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