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트리나는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가 흔들리던 시기 교회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중세시대 그레고리오 성가에 버금가는 일종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은 음악의 황제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팔레스트리나의 교회 음악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반하는 반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가톨릭 음악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의 확산으로 유럽에서 종교성지의 지위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 가톨릭 교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내부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선구자는 교황 파울루스 3세였는데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개신교의 논리를 반박하며 교회의 교리와 의식 관행들을 공인하면서 구체적인 쇄신 방안을 내놓게 됩니다. 이에 당대 작곡가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존중하며 그에 부합하는 음악 양식을 작곡 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반종교개혁은 줄리아 성당에서 성가대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팔레스트리나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고 그는 반종교개혁의 정신에 공감하면서 공의희의 요구에 부합되는 교회 음악들을 작곡했습니다.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들은 평온함과 속세 초월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몇 세기 동안 교회 음악의 모델로 간주되었습니다.
팔레스트리나는 '교회 음악의 구세주'또는 '음악의 황제'로 불리며 당시 반종교개혁의 음악을 대변하는 가톨릭 음악 양식의 최전선에 있던 음악가였습니다. 본명은 조반니 피레르루이지이지만 로마 근교의 팔레스트리나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서 팔레스트리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를 칭하는 이름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본명보다는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음악가로서의 팔레스트리나의 생애는 교회에서 시작해 교회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는 교회음악을 직접 겪으며 당대의 종교 음악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음악가였던 것입니다. 팔레스트리나는 어린 시절에 로마의 산타 마리오 마지오레 성당의 성가대원으로 봉사했습니다. 이후 1544년 고향인 팔레스트리나 마을의 산타 아가피토 대성당 오르간 주자로서 첫 직책을 갖게 됩니다. 7년 후인 1551년에는 좀 더 큰 교회로 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부속 교회인 줄리아 성당의 성가대 감독이 되었고 약 2년 후에는 마침내 음악 감독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1555년 1월 교황 율리우스 3세가 선출되면서 팔레스트리나는 성가대원은 미혼자여야 한다는 당시 자격에 위배되는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공식 교회인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돼 새로 부임한 교황 파울루스 4세가 교황청 교회의 독신 규율 엄수를 강조하면서 그는 시스티나 성당을 떠나게 됩니다.
1571년에는 해고당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다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1572년에 로마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들을 잃고 맙니다.
1577년 교활 그레고리오 13세는 팔레스트리나와 안니발레초일로에게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모은 책인 <그라두알레>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따라 다시 쓸 것을 요청했고 곧 그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작업은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는 못했도 1614년에 그라두알레메디치판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음악은 1908년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가족을 잃은 비극을 겪은 팔레스트리나는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1581년에 돈 많은 미망인 비르지니아 도몰리와 재혼하였고 재정적 원조를 얻어 작품 출판도 많이 하였습니다.
1586년 교황의 전속 작곡가 칭호를 받은 팔레스트리나는 대음악가로 존경받다가 별세하였으며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팔레스트리나는 약 105곡의 미사곡을 비롯하여 많은 모테트, 한가 등의 종교음악 외에 마드리갈 등의 세속곡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무반주의 성악곡이며 4~5성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는 플랑드르 악파의 다성수법을 충분히 몸에 익히고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표정을 잃지 않았고 호모리즘풍의 양식도 채택하여 긴밀한 구성으로 맑고 깨끗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종교 음악은 트리엔트 공의회에 의하여 지향된 반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른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에 와서도 가톨릭 교회 음악의 한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팔레스트리나의 양식들은 다음 세대 작곡가들에게 '구양식'의 표본으로 많은 종교 음악 작곡가들의 모방 대상이 되었습니다. 몬테베르디는 자신이 말한 '1작법'의 완벽한 예로 팔레스트리나를 꼽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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