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포 페리의 업적은 시인과 음악가의 합동 작업으로 간주되는 장르인 오페라를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페리는 1607년에 <오르페오>를 초연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와 함께 이 새로운 장르를 음악의 주요 예술 형식으로 정립했습니다. 오늘은 오페라의 시조인 야코포 페리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페리는 서양 음악사에서 '오페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중요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오늘날 오페라라고 부르는 작품을 역사상 처음으로 작곡하였습니다. 1597년에 썼다고 하는 <다프네>가 바로 그 작품입니다. 다프네의 악보는 찾을 수 없지만 1600년대 작곡한 그의 또 다른 오페라인 <에우리디케>는 남아있습니다. 오페라의 시조라고 하는 몬테베르디가 쓴 <오르페오>보다 7년이나 앞선 작품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성행했던 도시는 역사의 궤적과 함께 명암을 달리했습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느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행세했던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최고의 음악도시였다면 이 흐름은 역사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17세기 말에 이르면 왕들이 지배하는 파리, 빈, 런던 등이 음악의 중심도시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화와 예술의 성지로 각광받던 도시는 베네치아였습니다.
페리는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플로렌스에서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플로렌스에서는 여러편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오르가니스트 겸 독창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메디치 가문에서 테너 겸 키보드 연주자로 봉직하였으며 나중에는 작곡에 전념하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에서의 봉직을 마치고 작곡한 것들은 주로 연극의 막간 음악과 마드리갈이었습니다.
페리는 1590년대에 플로렌스의 음악 파트너인 야코포 코르시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른바 현대 예술이란 것이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에 비하여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비극을 재창조키로 결심하였습니다. 즉, 그리스의 비극을 재창조하므로 고전 예술을 꽃피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은 새로운 후원자들이 예술가들을 지원하면서 그들의 기호에 맞는 앙상블 유형들이 개발되면서 새 아기에 맞는 음악과 시와 춤이 조합된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 음악 장르들이 발달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예술 애호가와 대중으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것이 바로 1600년경에 등장하는 오페라입니다.
문제는 오페라를 하는데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이었습니다. 오페라는 준비에서부터 상연까지 거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왕실이나 귀족의 후원 하에 대도시 음악 중심지에서나 제작되고 상연되었습니다. 오페라에 투입되는 음악장치로는 최고의 성악과 기악이 앙상블을 이룬 단체 구성 연주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비용뿐만 아니라 음악 구성원들의 지원도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오페라 상연을 위해서 이러한 성악과 기악 앙상블 연주 단체에 유력 예술 후원자들이나 귀족, 왕실에서 거액의 돈이 투자됐습니다. 당연히 당시 음악가들의 희망은 중요한 궁정이나 대도시 주요 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음악 재능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며 최초의 오페라였습니다.
이 시대에 오페라를 이끌던 쌍두마차가 페리와 카치니였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단독으로 <에우리디체>를 완성했는데 카치니가 페리보다 두달이나 앞서 출판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 수준에서 보자면 카치니보다 페리의 오페라가 극적인 재미로 청중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페리는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레치타티보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발했습니다. 레치타티보 양식은 간단한 숫자 저음 반주의 노래로서 선율의 높낮이에 큰 변화는 없지만 그 리듬을 철저하게 가사의 흐름에 맞추는 양식입니다. 에피타티보 양식의 도입으로 인해 음악 역사가 들은 페리를 카치니보다 한 수 위 음악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리누치니와 페리의 다음 합작을 <에우리디케>였습니다. 이 작품은 1600년 10월 6일 처음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에우리디케>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다만 역사적인 호기심으로 이 작품을 들여다볼 뿐입니다.
<에우리디케>는 아리아와 아리아 사이에 또는 합창과 합창 사이에 음악 반주를 넣은 레시타비브를 사용하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연속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페리는 다른 오페라도 여러 편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오페라 스타일이라고 보기가 어려워 여간해서는 공연되지 않고 있습니다. 페리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몬테베르디라는 거성이 페리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순전히 음악적인 오페라를 만들어 내어 관심을 끌고 있었습니다. 몬테베르디를 위시한 후배 작곡가들에게 끼친 페리의 영향을 절대로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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