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발디는 베네치아의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여 토카타, 칸초네, 리체르카레 등의 분야에서 거대한 스타일의 음악을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하프시코드의 음악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겨 바로크풍의 건반악기 음악의 문을 열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로마의 3대 음악가 중하나인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전통적인 피아노 외에도 새로운 건반악기들이 속속 등장해 이 악기들을 연주하기 위한 연주기법을 담은 작곡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대에 새로 나온 건반악기로는 클라비코드, 하프시모드, 포르테피아노, 오르간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건반악기를 연주하기 위한 다양한 연주법이 나오게 되고 토카타도 그런 연주법 중에 대중의 사랑을 받던 연주법이었습니다. 토카타란 원래 '만지다, 건드리다'는 뜻의 이탈리아어의 동사인데 건반을 눌러서 연주하는 동작, 즉 건반악기의 연주를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연주의 방법을 지칭하는 토카타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기법은 바로 즉흥적으로 연주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토카타는 건반악기에만 해당하는 관용적인 음형들, 예를 들어 스케일이나 다양한 트릴과 장식음 같은 음형들을 많이 사용하여 즉흥적인 표현력을 높였습니다.
프레스코발디는 1583년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 프레스코발디는 오르가니스트였으며 꽤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재력 덕분인지 프레스코발디는 어려서부터 쟁쟁한 스승들 밑에서 음악을 배웠는데 특히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이론가였던 루자스코 루자스키 밑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건반악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프레스코발디는 어려서부터 음악신동으로 각광받았는데 불과 14살 때 지역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고 일찌감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작곡과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20살이 되기 전에 이미 촉망받는 음악가로 귀족들의 후원도 받았습니다. 전도유망했던 청년 음악가 프레스코발디는 20세에 페라라를 떠나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서 프레스코발디는 1607년 트라스테베레의 산타마리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합니다. 동시에 그는 로도스의 대주교 귀도 벤티볼료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했으며 교황의 외교사절이었던 귀도 대주교를 따라 유럽 각지를 여행하게 됩니다.
1608년 7월 프레스코발디가 아직 네덜란드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프레스코발디를 전속 오르가니스트로 데려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름 동안 네덜란드에 계속 머물렀으며 귀국 도중 밀라노에 머물면서 자신의 건반음악 모음집까지 출판했던 탓에 영입 결정 후 무려 3개월이 지난 10월 말이 돼서야 정식으로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습니다.
17세기의 내로라하는 피아노 작곡가 중에 특히 '토카타' 작곡가로 당대에 빛났던 작곡가가 프레스코발디였습니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이탈리아 건반음악의 최고봉이었습니다. 프레스코발디가 활약했던 17세기 이후오 근 100년이 지나도록 그와 견줄 말한 건반악기 작곡가나 연주가는 없었습니다. 그의 시대를 초월한 빼어난 연주곡들은 1615년과 1627년에 출판된 작품집 <토카타와 파르티타> 두 권과 <음악의 꽃>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사실 프레스코발디의 피아노 작품집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그가 강조했던 '즉흥연주'란 당시로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연주법이었습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왜 즉흥연주가 건반악기 연주의 자유와 상상력을 가져다주는지를 그만의 화법으로 강조해 당대 음악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책에서 개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상상력과 연주자의 자유로운 표현이 기교적이고 실험적인 연주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1610년부터는 피에르토 알도브란디니 추기경 소속의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613년에는 오솔라 트라발리니라는 여성과 결혼하는데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프레스코발디 부부는 결혼 후 3명의 자녀를 더 낳아서 총 5명의 자식을 둡니다.
로마에서 13년간 활발한 연주 및 작곡활동을 하던 프레스코발디는 1628년 투스카니 대공으로부터 거액의 급료를 제안받고 피렌체로 떠납니다. 그는 약 6년간 피렌체에 머물며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및 궁정 음악가로 활동합니다.
1634년 로마로 돌아온 프레스코발디는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속한 바베리니 가문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하게 되며 동시에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복귀합니다. 이 시기 그는 매우 중요한 건반음악작품 모음집인 <피오리 무지 칼리>를 출판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프레스코발디는 60살이 되던 1643년 원인이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병에 걸려 10일간 크게 앓아누웠으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12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8세기 후반 성당의 재건축 과정에서 무덤이 소실되고 말았으며 현재 12 사도 성당에는 그의 무덤 대신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프레스코발디는 기악음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바로크 음악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성악 작품들과 앙상블 칸초나도 작곡했으나 특히 건반악기 연주와 건반악기 작품들로 당대 바로크 음악을 빛낸 위대한 건반악기 음악가이자 이론가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성과는 그의 건반악기 토카타, 판타지아, 리체르카레가 당대에는 물론 이후 바흐 부다 시대까지 모든 건반악기 작곡가들의 모범으로 금과옥조처럼 다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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