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유럽 음악을 주도했던 플랑드르악파의 거장이자 15세기 중후반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한 사람인 요하네스 오케겜은 현재에는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훌륭한 가수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요하네스 오케겜의 음악과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르네상스 음악의 양대 산맥은 부르고뉴 악파와 플랑드르 악파입니다. 이두 악파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곡가들이 대거 양산되었는데 대부분 교회와 관련된 종교 음악을 주로 다루던 음악가들이었습니다. 이중 플랑드르악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나 프랑스 왕, 교환에게 봉사하면서 지역적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주요 도시의 궁정에서 활동했습니다.
서양음악사에서는 플랑드르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오케겜을 첫 손꼽습니다. 오케겜의 음악적 성과는 기존의 대륙의 음악 양식이 전체적인 화음을 고려하는 모방 대위법 양식으로 일관됐던 음악이었다면 여기에 다양한 다성음악을 발달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성음악 양식을 통해 기존의 대위법에서 탈피해 모든 성부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오케겜은 플랑드르악파의 첫 세대의 대표 작곡가로 주로 교회에서 사용하는 미사와 모테트 음악을 발전시킨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케겜의 초기 생애에 대해선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단 출생 연도부터 불확실합니다. 대략적인 출생 연도는 1410~1425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니 이설도 많습니다. 1993년에 그가 현재 벨기에 영역에 있는 생기 슬랭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있는 16세기 문헌이 발견되면서 현재는 생기 슬랭이 출생지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진 상황입니다.
오케겜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1443년이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를 최초로 언급한 이 문헌에서는 안 트베르 펀에 있는 옹즈 리브 브루베 성당에서 가수로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에 재직할 당시 오케겜은 존 던스터블을 필두로 하여 유럽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영국식 음악 양식과 기욤 뒤파이, 질 뱅슈아 등의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을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케겜의 행적이 다소 특이한 점은 당시 음악가들이 여행을 통해 음악적 견문을 넓혔던 데 비해 그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고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 왕실에서 봉사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프랑스 왕실에서 놓아줄 수 없는 매혹적인 저음의 목소리를 자랑하는 스타 가수였기 때문에 미처 다른 나라를 여행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려한 베이스 가수로 명성이 높았던 황금 목소리를 가진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당시 음악 애호가들인 왕족, 귀족, 추기경들에게 가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타급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여기에 탁월한 작곡 능력을 겸비해 대중의 인기와 고급한 음악 재능까지 두루 갖춘 당시 보기 드문 종합 음악인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훌륭한 작곡가들도 여러 명 배출해낸 유능한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1446~1448년에는 부르봉 공 샤를 1세의 궁정 음악가로 재직했으며 1452년경에는 파리로 옮겨서 프랑스 왕실의 악장이자 투르에 있는 성 마르탱 대성당의 재무관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후임자 루이 11세 밑에서 계속 궁정 음악가로 활동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도 직책을 맡았습니다. 오케겜의 음악은 반음계적 변화가 거의 없는 선법성을 보이며 프레이즈가 길고 종지가 잦지 않은 흐르는 선율이 특징입니다. 베이스 가수였던 그는 하성부를 더 낮은 음역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모든 성부들에 동등성을 부여했습니다. 1450년 이전에는 하성부의 음역이 C음 이하로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지만 오케겜은 두 옥타브 낮은 C음까지 확장시켰습니다.
학자들은 말년의 오케겜이 대체로 부르게나 투르에 살면서 작곡과 음악교육에 종사하다가 1497년 투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그를 존경했던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조스캥 데프레의 샹송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는 매우 유명합니다.
오케겜은 명성에 비해 남은 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13곡의 미사곡 중 3곡은 미완성이며 단악장 크레도 1곡, 다성으로 작곡된 최초의 레퀴엠 미사곡, 5곡의 모테트, 20여 곡의 샹송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 작곡의 지위 여부가 분명치 않은 교회 음악 10곡 정도와 샹송 5곡이 있습니다. 미사곡의 수가 비교적 많은 것은 이것이 15세기 후반의 중요한 악곡 형식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시의 작곡가들은 미사 형식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서양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악의 황제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1525~1594) (0) | 2022.08.05 |
---|---|
음악의 미켈란젤로 하인리히 이자크(1450~1517) (0) | 2022.08.04 |
부르고뉴 악파의 대표 작곡가 질 뱅슈아(1400~1460) (0) | 2022.08.02 |
15세기 유럽 음악의 주도자 기욤 뒤파이(1400~1474) (0) | 2022.08.01 |
음악의 왕자 존 던스터블 르네상스 음악가(1390~1453) (0) | 2022.07.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