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오르간 곡과 종교곡을 작곡하여 중기 바로크 음악의 정점을 이룬 연주회의 대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연주회 개최로 많은 독일의 음악가가 그의 연주회에 모여 그 후의 독일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연주회의 거장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7세기 바로크 음악 연주의 중심에는 건반악기 오르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오르간 음악은 루터교가 성행한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 음악으로 꽃피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종교 음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오르가니스트는 뤼베크의 북스테후데, 뤼테 부르크의 게오르크 뵘, 작센 지방의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등이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출생 기록은 거의 남아 잇지 않지만 아버지 요하네스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헬싱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북스테후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658년과 1660년부터 1668년까지 두 번에 걸쳐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됩니다. 이 시기에 북스테후데의 이름이 알려졌는지 1666년 2월에는 코펜하겐으로까지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덴마트 왕국에는 전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있었는데 덴마트 왕도 직접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다녀오는 등 문화 강국이었습니다. 이 대 북스테후데는 북유럽의 음악양식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그의 성악곡에 이러한 영향이 많이 드러납니다. 바로크 음악을 선도하는 오르간 연주가 당대의 최고 음악으로 선포되던 시절에 북극해와 발트해에 인접한 북부 독일의 부유한 도시들은 더 크소 더 좋은 오르간을 제작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수한 오르간의 특징을 반영한 음악가들을 발전시키면서 이른바 북독일 오르간 악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디 트리히 북스테후데가 있었습니다.
바로크 시대 북독일의 가장 위대한 오르간 작곡가로 꼽히는 북스테후대의 오르간 음악은 코랄 선율에 기초한 작품들과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된 작품들로 크게 나뉩니다. 북스테후데는 코랄에 바탕을 둔 작품들을 50곡 정도 남겼고 자유로운 작품들 중 규모가 큰 작품만 해도 약 30곡 정도에 이릅니다.
1668년 북스테후데는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 도전하러 독일의 뤼베크에 왔습니다. 그는 4월 11일에 뤼베크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됩니다. 7월 23일에 스는 뤼베크 시민권을 획득하고 8월 3일에는 전임자 툰더의 딸 안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습니다. 금슬은 좋았는지 북스테후데 부부 사이에는 7명의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은퇴한 아버지와 가족을 데리고 뤼베크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는 교회 음악 말고도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인자이자 장인이었던 툰더가 시작한 저녁 음악회, 아벤트 무지크를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이 음악회는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떨쳐 뤼베크 시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아벤트 무지크로 개인적인 명성을 높였으며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도 받았습니다. 작품은 오르간 곡 외에 다수의 칸타타와 미사곡이 있으며 이것들은 형식의 다양성과 내면적 정서의 깊이에 있어 중기 바로크의 독일 프로테스 판트 음악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1705년 11월부터 다음 해인 1706년 2월까지 뤼베르에 머무르며 북스테후데가 지휘하는 아벤트 무지크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북스테후데가 작곡한 레오폴트 1세를 추모하기 위한 오라토리오 <슬픔의 군대>와 새로 재위한 요제프 1세를 축하하는 <명예의 사원>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최고의 음악가였던 북스테후데는 이 젊고 야심 찬 바흐가 마음에 들었는지 후임 자리를 제안했으나 바흐는 거절하고 서둘러 뤼베크를 떠납니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테크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그의 <24편의 프렐루디움>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페달 성부가 따로 있어서 페달 건반이 장착된 대형 오르간으로 연주해야 합니다. 페달 테크닉에 정통한 오르가니스트만 연주할 수 있는 현란한 베이스가 이 곡들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더해줍니다. 프렐루디움은 영어의 프렐류드에 상응하는 라틴어인데 17세기 독일에서는 자유로운 형식의 오르간 작품을 프렐루디움이라고 불렀습니다.
1707년 5월 9일 북스테후데는 세상을 떠났고 5월 16일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안장됩니다. 북스테후데는 사망할 때까지 성모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는데 이 교회의 주요 예배를 위해 오르간을 연주했을 뿐 아니라 그 예배에 맞는 오르간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바흐와 다른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북스테후데는 오르간 음악 외에 종교 성악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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