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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 빈첸초 벨리니(1801~1835)

by 어니스트-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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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빈첸초 벨리니는 유려한 선율로 유명하며 도니체티, 로시니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으로 불리는 빈첸초 벨리니의 음악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벨리니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음악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도로 일찍부터 작곡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6살 때 첫 번째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이후 가족들의 권유로 18세의 벨리니는 나폴리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칭가렐리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재학 중이던 1825년에 <아델손과 살비니>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의 완벽한 형식으로 이탈리아를 떠나버린 로시니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습니다. 1826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의 의뢰로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1827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의뢰로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탈리아의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시에 의한 <해적>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 1829년 <이국의 여인>과 <차이라>, 1830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카 플렛가와 몬테규가>라는 오페라로 작곡하였고 1831년에는 <몽유병 여인>과 <노르마>를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1388년에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상연한 후 파리로 이주하여 1835년에 최후의 오페라 <청교도>를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벨리니는 19세기 초 이태리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도니체티와 더불어 당대의 거장으로 꼽힙니다. 벨리니의 기품, 우수에 찬 선율의 아름다움은 19세기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창조적인 선율에 영향을 받은 쇼팽은 임종 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고 바그너, 고티에 등도 벨리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올려놓기까지 했습니다. 오페라의 아리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선율은 그의 오보에 협주곡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잇기도 합니다.

 

오페라 <청교도>는 빈첸초 벨리니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로 총 3막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835년에 초연했으며 원작은 프랑수아 앙슬로의 <공화파와 왕당파>, 벨리니의 작품 중 <노르마> 오페라와 <몽유병의 여인>과 함께 가장 공연 횟수가 높은 오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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