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타고난 병약함의 어려움 속의 31세의 동안 690여 편의 가곡, 80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던 그를 우리는 가곡의 왕이라 부릅니다. 오늘은 이러한 가곡의 왕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세기 초 서양 음악에 혜성같이 나타난 비운의 천재 슈베르트는 낭만주의 음악이 무엇인지를 작품을 통해 몸소 보여준 음악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우아하고 고상한 품격 높은 클래식의 세계를 700여 편 가까운 가곡과 소나타, 오페라 등을 통해 음악 언어를 표현한 낭만주의 음악가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낭만주의 음악의 색깔을 짙게 풍기는지 베토벤보다 겨우 1년 뒤에 죽었음에도 후세 음악 가사들은 그를 초기 낭만주의 음악가로 분류합니다. 슈베르트의 작품에서는 당대의 모든 음악 장르에서 미래를 예시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술가곡 장르가 무엇인지를 주옥같은 명곡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너무나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피아노를 위한 독주곡이나 실내학, 교향곡에 삽입된 소나타 등에서는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그의 수준 높은 음악세계가 진하게 묻어나옵니다.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를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습니다.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습니다. 7살부터 슈베르트는 지역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저로부터 교습을 받았습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지도를 받았고 1808년에 는 궁정 신학원 스타드 콘빅트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몰래 작곡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대노하여 아들과의 연을 끊으려 하였습니다.
슈베르트는 머릿속에 온통 악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고통은 그것을 옮겨 담을 오선지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바장조의 미사곡을 작곡하였는데 이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 번째 애인이었습니다. 슈베르트는 테레제에게 가곡 <들장미>를 만들어 선물하였습니다. 테레제는 감격하여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으나 둘 사이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19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의 친구였던 포글을 만났습니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존중하여 슈베르트가 지은 노래를 많이 불러 그의 노래를 세상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1818년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헝가리의 첼 리즈에서 보내며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했습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습니다. 1819년에 <유랑인>, <제5 교향곡>과 1823년에는 <유랑인의 환상곡>, <로자문데>등을 발표했고 그해 여름에는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습니다. 슈베르트는 타고난 선율가였습니다. 그의 선율은 종종 민속적인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 결코 단순한 통속성에 빠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소리에 대한 슈베르트의 섬세한 감각을 피아노와 기악 관현악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습니다.
1822년 메독에 감염된 슈베르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 년 가까운 시간을 매독의 고통 속에서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그로 인해 이듬해 입원했습니다. 치료 후유증으로 탈모가 심해 가발을 쓰고 다녔고 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 죽음을 예감했고 아주 많은 걸작들을 쏟아내었습니다. <미완성 교향곡>. <나그네 환상곡>, 교향곡 제9번 <겨울 나그네> 등과 그전에 쓴 가곡 <죽음과 소녀>를 주제로 현악 4중주를 작곡하였습니다. 병이 재발되면서 여러 합병증이 그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당시 그의 주치의는 신경열로 진행됐다는 진단과 함께 차, 발포성 고약 과 겨자 포대 등으로 치료했습니다. 그 후 슈베르트는 고통 속에서 머리의 열기와 무력감을 호소했고 저녁이 되면 갑자기 헛소리를 하면서 의식장애가 나타나 다음날까지 계속됐다고 합니다. 이런 증상으로 의사 슈 바이스 하이머는 그의 사망 원인이 장티푸스라고 주장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서양 음악사에서 몇 안 되는 탁월한 음악 천재였습니다. 흔히 슈베르트는 모차르트와 함께 거론되며 '요절한 천재'에 대한 신화를 남겼는데 사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요절하리라고 본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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