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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 이야기

낭만주의의 모차르트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

by 어니스트-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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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였던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의 극음악을 만들었습니다. 바흐, 헨델, 베토벤 등의 음악을 새롭게 선보이며 널리 알렸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낭만주의의 모차르트라 불리는 펠릭스 멘델스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유태인 가문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 니트 볼트 학파의 한 사람인 모제스 멘델스존, 아버지는 부유한 은행장,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가였는데 그녀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1811년 프랑스가 함부르크를 점령하는 동안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멘델스존은 루트비히 베르거에게 피아노를 작곡가이자 선생으로 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K.F.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그 밖의 선생들도 어린 멘델스존에게 문학, 풍경화 등을 가르쳤으며 그 결과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소년 시절 동안 5개의 오페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11곡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푸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1818년 9세 때 베를린에서 첫 공개 연주를 했습니다.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멘델스존의 생애는 참으로 행복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과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 좋은 벗들과의 교류 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부모 외에도 그를 사랑하는 누나 파니가 있었습니다. 파니는 동생 펠릭스 못지않은 뛰어난 음악적 천재였습니다. 13살의 파니는 바흐의 <평균율> 악보를 외워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또한 상당한 작곡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중 일부는 그녀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였습니다. 파니는 멘델스존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였으며 멘델스존의 음악세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자기의 천재성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초 당시 시대 분위기는 상류층 여성이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멘델스존에게 음악은 '직업'이었지만 그녀에겐 취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음악과 그림여행을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감명을 받아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이라>를 썼습니다. 이 곡은 1833년 초연하였으나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살아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매력적이고 우아한 작품들로 그는 점차 19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가 되어 갔습니다. 영국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짧은 생애 동안 영국을 적어도 10번 이상 방문했습니다. 1943년 버킹엄 궁전에서 영국 여왕과 여왕의 부군을 만났습니다. 영국에서 그의 음악은 빅토리아적이라고 평가되었고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은 작곡가 중 멘델스존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향곡>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1833년에 멘델스존은 독일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이 되어 첫 오라토리오 <성바울로>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1835년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이악장의 연주 수준을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를 독일 최고의 음악 도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같은 해 멘델스존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최대의 소망을 아들이 <성 바울로>를 완성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각오로 작업에 뛰어들어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이 곡을 지휘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 세실 장 르노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16세로 멘델스존보다 10세나 어렸습니다. 두 사람은 1837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는 15살 때 음악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작곡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니는 화가 빌헤름 헨젤과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녀가 주최하는 살롱에서 음악활동을 하였습니다. 파니가 주최한 살롱은 당시에 가장 유명한 살롱이었다고 합니다. 피아노에 능숙한 그녀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동생 멘델스존의 피아노곡 <무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음악가로서의 명성과 창작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40세가 되어서야 파니는 화가인 남편의 이해와 격려에 힘입어 베를린에서 작품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누이 파니의 죽음은 멘델스존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 그녀를 따라가려는 듯 멘델스존도 눈을 감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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