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중간에 위치한 낭만주의의 절대적 신봉자이다." 오늘은 낭만적 음악의 포에지라 불리는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양 음악, 그중에서도 낭만과 사랑의 피아노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코 슈만이 가장 앞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만큼 슈만의 음악에는 평화와 안식의 선율이 고요히 감상자의 가슴을 적시는 특별한 명상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평온해지거나 혹은 숙연해지고 한때는 우울하다가도 더할 나위 없이 밝고 명랑해지며 어느 순간 다시 기괴해지다가도 결론은 고상해집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낭만적입니다. 또한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은 비정치적입니다. 슈만은 1810년 작센 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저작도 겸한 출판업자였습니다. 슈만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작곡까지 손을 댈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슈만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작곡가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에게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826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슈만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는 어머니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슈만은 라이프치히에 온 지 며칠을 못 참고 피아노 선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슈만은 빨리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에 너무 무리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손가락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강화훈련을 하면 속주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손가락이 부러져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그 후로 슈만은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몇 번이고 자살의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낸 슈만은 추락의 충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5층의 집에서 2층으로 옮기게 됩니다. 1829년 여름 슈만은 라이프치히를 떠나 하리 델베 르크로 갔습니다. 그곳의 법학교수인 안톤 프리드리히 유스투스 티보는 음악미학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고 티보의 영향으로 슈만은 초기 합창음악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츠 양식을 따라 왈츠를 작곡했습니다.
1830년 어머니로부터 라이프치히에 가서 비크 교수와의 피아노 수련기간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비크는 슈만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고된 연습을 견뎌낼 수 있는 의지와 능력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다치는 바람에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희망은 좌절되었지만 그로 인해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에게 불행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이 시기에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규만의 작품 1번은 변주곡 모음으로 183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슈만은 피아노 선생인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비크의 딸 클라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막 성공적인 연주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슈만은 16세였던 클라라와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의 사랑에 응답을 했지만 아버지 비크의 명령에 따라 관계를 끊었습니다. 슈만의 음악에는 저변에 젊은 시절 사랑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와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년간 그녀의 아버지와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다음에야 그녀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이때의 충만한 사랑은 슈만 내면에 예상을 넘어서는 독창적인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이 시절 그는 하이네, 뤼케르트, 그리고 아이헨도르프의 작품을 가지고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훗날 청중으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슈만은 16개월 동안 자신을 내팽개쳤고 그동안 절망과 체념의 반복 상태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로 표현하는 한편 술에 만취해서 지냈으며 다른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같은 스승 비크의 제자인 에르 네스티 네폰 르이켄과의 연애로 2곡의 중요한 피아노 작품이 탄생되었는데 1835년의 첫곡 <사육제>는 재미있게도 애인이 살던 '아슈'라는 고장의 철자이며 A, S, C, H의 음을 활용해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코드 암호입니다. 슈만은 1839년 6월 15일 클라라와의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 위한 법적 소송 절차를 밟아 마침내 1840년 9월 12일에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생에 걸쳐 슈만은 속물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음악적으로 편협한 이들과의 전쟁을 통해 그가 이루려 했던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교양으로서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려 하였습니다. 청년 시절 슈만은 뜻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약간은 정치적이고 만이 이상적인 다소 허구적인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다비드 동맹'이라 불린 이 클럽에서는 프리드리히 비크가 '마이스터 라로'라는 이름으로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슈만은 비크와 더불어 '다비드 동맹'을 보다 구체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슈만은 곧 오래지 않아 마음이 맞는 역사상 실존 인물들을 다비드 동맹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그가 경탄하던 작곡가들 예를 들어 저 멀리 파리에서 살고 있던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과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있었으며 이미 오래전 작고한 마이스터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로베트르 슈만은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다비드 동맹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비드 동맹은 단지 정신적으로만 낭만적일 뿐이다."
결혼에 성공한 슈만은 전 생애중 가장 창작욕구가 왕성한 시기에 접어들었고 상상력이 넘치는 일련의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습니다. 그해 초반에 슈만은 거의 12년 동안이나 손을 놓고 있던 분야인 가곡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1840년 2~12월의 11개월 동안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가곡들 대부분을 작곡했습니다. 미르텐과 하인리히 하이네와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2개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과 같은 연가곡들이 이 기간에 작곡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슈만은 <교향곡 1번 B장조>를 작곡했고 이곡은 3월 31일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에 의해 라이프치히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노래들은 독일의 라인 강을 완전한 조국애의 상징으로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습니다.
1853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부부에게 운명의 사내가 나타납니다.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온 파릇파릇한 20세의 청년 브람스, 그는 슈만 부부 앞에서 신기의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평소에 과묵하고 감정표현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슈만은 천재의 방문이라고 그 답지 않게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던 클라라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슈만의 눈에 확실히 띄었고 그의 제자가 되기에 이릅니다. 슈만의 집에서 한 가족처럼 지내며 음악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브람스의 등장 이후 그토록 금슬 좋은 슈만 부부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슈만이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졌고 급기야 정신착란을 일으켜 끝내는 정신병원에서 자살을 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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