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의 오페라는 재미있는 줄거리와 달콤한 멜로디, 탁월한 무대 감각, 경제적인 짜임새, 뛰어난 관현악법으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벨칸토 낭만주의의 빛나는 꽃으로 불리는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의 음악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세기 들어 이탈리아 오페라는 '로시니'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서 부파 오페라가 다시 부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8세기 말까지 오페라의 중심은 단연 이탈리아의 부파 오페라였지만 19세기 초 다시 오래전 오페라인 세리아가 중심 장르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부침 속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모든 영역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이 변화에 앞장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불세출의 오페라 스타가 바로 로시니였습니다. 로시니는 이탈이라의 페사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주세페 로시니는 악대, 관현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한 가난한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 안나 구이 다리니는 무명가수였습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로시니는 어린 시절을 주로 공연장에서 보냈습니다. 어린 로시니는 게으른 성격이었지만 노래와 연극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4세 때 마르티니 국립음악원의 전신인 볼로냐의 음악협회에 들어갔고 바이올린, 호른, 하프시코드, 피아노를 배웠고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18세 때인 1810년 로시니는 음악원을 졸업했습니다. 로시니는 이미 독일 음악 악파의 중요성, 특히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풍부하게 된 새로운 음악 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는데 음악협회에서 작곡한 초기 칸타타에 이러한 영향이 보입니다. 로시니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장르인 오페라 부파에 몰두했습니다. 1810년 로시니의 첫 오페라 부파 <결혼 어음>은 이례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인해 가수들의 비난을 사기는 했으나 베네치아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로시니는 오페라 부파의 전통적인 형식을 깼습니다. 이탈리아의 현란한 가창 양식인 벨칸토 창법을 새롭게 재창조하여 선율을 장식하거나 앙상블과 앙상블 피날레에 이례적인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또한 관현악이 원래 맡던 역할을 회복시켜 음악이 가수를 돕는 것이 아니라 가수가 음악을 돕도록 만들었습니다. 로시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과의 계약으로 <시금석>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피어나기 시작한 그의 천재성을 드러낸 진정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오페라의 피날레 장면에서 로시니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이 되는 크레셴도 효과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가수들과도 친밀감이 생긴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의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기회는 이탈리아의 가장 세련된 도시였던 베네치아에서 찾아왔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이끌었던 도시는 밀라노, 나폴리, 파르마, 로마, 베네치아였습니다. 1810년에서 1830년까지 이도시의 오페라 음악가는 단연 조아키노 로시니였습니다.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특징적인 형성은 로시니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1813년 테아트로 산 모이세 극장을 위해 희가극 <브루스 키노 씨>를 작곡한 로시니는 이어서 라 페니체 극장을 위해 첫 정가극 <탄크레디>를 작곡했으며 이를 통해 18세기의 관습에 젖은 정가극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1815년 그의 명성은 곧 나폴리로 퍼졌습니다. 나폴리에서 2개의 커다란 극장을 소유한 대 흥행주이며 백만장자인 도메니코 바바리아가 작품을 의뢰하는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바바리아가 고용하고 있는 당시 유명한 여가수 이사벨라 콜브란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그녀와 공연한 로시니의 첫 오페라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을 통해 로시니는 콜브란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29년 마지막 오페라 <윌리엄 텔>은 민족주의와 자유라는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작품입니다. 파리 청중들은 그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냈으며 로시니는 이 한 작품으로 파리 평론가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 텔>은 파리 오페라극장의 개관 기념 오페라 5곡 중 첫 번째 오페라가 될 예정이었으나 1830년 혁명 뒤 새로운 정부는 그와의 계약을 번복하였습니다. 37세의 로시니는 이후 더 이상 극음악을 작곡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음악활동을 그만두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모두 37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일찌감치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모아놓은 돈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극음악에서 은퇴한 그는 초년에 열정을 쏟았던 종교음악에 심취하게 되어 <성모 애가 스타바트 마테르>, <작은 장엄미사> 외에 몇 곡의 노래와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세련된 감각으로 그의 명성을 굳히는데 기여했지만 로시니는 이곡들의 출판을 거부했습니다.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제목은 그보다 52세나 연상인 오페라 작곡가 파이 젤로가 이미 34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만들었던 것으로서 후배인 로시니가 자신의 양해도 없이 동명의 가극을 작곡한 것에 대해 파리 젤로는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파리 젤로의 마음은 로시니의 공연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자 제자를 시켜 가극 속에서 소품으로 쓰이는 기타 줄의 음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공연 진행 중에는 무대 위에 고양이를 풀어놓아 가수들을 놀라게 했으며 관중석의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게 하여 공연을 망쳐놓아 결국 초연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파이 젤로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오늘날 세계 각국의 오페라 무대에 귀중한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에 농담을 즐기는 로시니의 성품처럼 그의 오페라는 생기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특히 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이란 엄청난 사건이 훑고 지나간 암울한 시기에 유럽인들은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로시니의 오페라는 화려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지니고 잇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능숙하지 못했던 관현악법에 정통했으며 무엇보다 무대 효과에 대해 타고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시니는 세리아와 부파 두 장르 모두 관심을 갖고 가꾸었으며 두 장르는 음악적 수단의 배치에서 서로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로시니 오페라의 특징은 번호 원칙의 고수와 확대 및 유연화에 있습니다. 로시니의 오페라 중심에는 '음악적 극창'이 놓이는데 이 양식의 주요 특징은 점진적인 고조를 향해 나아가는 정교한 구성에 있습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오소적 부분들이 여러 번에 걸쳐 교대되는 가운데 나란히 이어지면서 갈채를 유도하는 효과적인 스트레타에서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양식에 대한 변형 테로서 서로 갈등하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인 '2중 극장'이 있으며 또한 극정 구성의 절정으로서 장면의 마지막 부분이나 막의 끝부분에 합창과 함께 등장하는 장중한 피날레가 잇습니다. 1829년 작인 <윌리엄 텔>을 끝으로 한창나이인 37세에 오페라에 손을 뗀 그는 1868년 76세를 일기로 파리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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