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작곡가인 마이어베어는 독일에서 배운 치밀한 작곡기법과 이탈리아식 선율, 프랑스식 취미를 절충해 이를 호화로운 의상과 장치로 더욱 효과적으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랜드 오페라의 거장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양의 원죄와도 같은 반유대 정서는 어릴 적부터 될 성 부른 음악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많은 유망주들에게 자신들의 '유대계' 이름을 포기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성과 이름을 하나로 합쳐 '아이어베어'로 개명했는데 그러는 편이 유대계 냄새가 훨씬 덜했습니다. 자신이 새롭게 추가한 '야콥'이란 이름은 이탈리아식으로 '자코모'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재능을 일찍 펼쳤고 7살 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음악계에 데뷔해 천재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뿌리 깊은 반유대 정서를 갖고 있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이 음악가로 성공하기는 사막에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미성년이던 아말리아의 아들 마이어베어가 콘서트에서 두각을 나타낼 당시 왕실 일가 모두가 그의 연주를 보러 찾아왔다 할지라도 그건 그리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자칭 자코모 마이어베어라고 이름을 바꾼 이 인물은 처음엔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궁정에서의 유리한 입지 덕분에 평탄한 출세를 보장받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부단히 찾아오는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걸출한 살롱의 여주인으로 인정받고 있을지라도 사회 안에서 그는 매번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하는 곤란에 직면했습니다. 마이어베어가 스물한 살이던 1812년 일기장에서 그는 이렇게 속 마음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 라시엔이 내 영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건드리며 내 기분을 망쳐 놓았고 내 용기와 명랑함 마저도 꺾어놓았다. 언제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피할 수 없는 모멸감에 조용히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될까?"
마이어 베어는 베를린과 다름슈타트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다름 슈타트에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21세였던 1812년 그의 첫 오페라인 <제프타의 맹세>를 뮌헨에서 초연하였고 이후 오페라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병행합니다. 이때 그의 오페라를 관람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눈에 들어 그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공부를 한 뒤 로시니 양식의 오페라 5곡을 제작하여 주목을 받습니다. 마이어베어는 프랑스식 낭만주의적 취향을 겨냥한 오페라로 파리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작곡가입니다. 피아니스트의 길을 버리고 작곡법을 배워 작곡가의 길을 걷습니다. 1825년 오페라 <이집트의 십자군>이 파리에서 큰 성공을 얻자 파리에 정착합니다. 마이어베어가 연출한 <유대인 여자>에 청중들은 열광했습니다. 열광의 이유가 단지 그랜드 오페라의 특유의 사치스러운 연출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는 이 공연을 위해 무대 위에 무려 20마리의 순종 말들을 역사적 고증에 따라 화려한 치장을 하고 등장시키기는 했습니다. 물론 청중들은 볼거리에도 충분히 만족하면서 오페라 역사상 최초로 유대인 여자가 타이틀 롤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화끈하게 반응했습니다.
<유대인 여자> 초연 1년 뒤 마이어베어는 종교극 <위그노 교도>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1572년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가톨릭 연합이 위그노 교도들을 체포해 학살한 극정인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위그노 교도>가 1814년 프로이센에서 초연될 수 있었던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덕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동안 '불건전한' 종교적 내용을 이유로 상연이 금지되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황제에게 음악을 이용해 가장 확실한 존경의 표시를 보여주며 이에 보답했습니다. 그는 황제를 위해 프로이 센 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오페라 <슐레지엔에서의 야영>이란 축제극을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화재로 소실되었던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의 재건에 즈음하여 상연되었습니다. 사실 이 오페라의 대본은 프랑스 작가 스크리브가 집필했습니다. 그만큼 신랄한 작가가 프로이센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1831년 마이어베어는 그의 첫 그랜드 오페라인 <악마 로베르>가 대성공을 거두자 1836년부터 <위그노 교도>, <시칠리아의 진영>, <예언자>를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프랑스 오페라를 호화롭게 제작하여 중세적 정신과 초 자연성, 공포 등에 대한 당시의 낭만적 취향에 맞추었습니다. 덕분에 이 작품들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어 화려하고 규모가 큰 프랑스 그랑 오페라계의 거장으로 군림하였습니다. 1842년에 잠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프로이센 왕으로부터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바그너의 작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공연을 총괄했습니다. 당시 인기 잇는 대본가 스크리브를 만나 그의 대본에 의해 만든 3번째 낭만 오페라 <예언자>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보다 가벼운 양식의 오페라로 전환하여 오페라 코미크의 전토에 입각한 2개의 작품 <북극성>과 <디노라>를 제작했습니다. 마이어베어와 리하르트 바그너는 스케일이 크고 신화, 전설, 실제 역사를 소재로 극적인 오페라를 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이어베어는 바그너를 후원하기도 했으며 바그너 본인도 초기에는 마이어베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마이어베어가 죽은 후 그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는 표리 부동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그너가 극렬한 반 유대주의자였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음모론은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했습니다. 바그너가 마이어베어를 미워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생전에 바그너의 작품은 비슷한 성격의 마이어베어의 작품에 항상 밀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이어베어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뤄낸 성공은 충분히 바그너의 질투를 살 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리하르트 바그너는 주세페 베르디와 함께 오페라의 양대 거목이라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둡니다.
마이어베어는 만년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1862년 파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작곡을 하였습니다. 마이어베어는 살아 있을 당시에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명성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극적인 성악 구성 양식, 관현악법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특히 베이스 클라리넷, 색소폰, 바순의 새로운 사용한 훗날 오페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교적 신념을 지키면서 다음과 같은 탈무드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습니다. "선행은 몰래 실천하고 악행은 아무리 가벼울지라도 피하며 열심히 살아가라. 너의 집 대문을 활짝 열어 불쌍한 사람들을 거두어들여라." 시련과 고난의 생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며 그랜드 오페라의 거장으로 우뚝 선 이후 그는 탈무드의 가르침대로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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