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음악 풍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의 독일 오페라를 출범시킨 독일의 음악의 영웅입니다. 오늘은 낭만파의 선구자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베버는 음악 및 연극에 종사하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란트 안톤은 음악가이자 조그만 유랑극단의 경영자였고 어머니 게노 베파는 가수였습니다. 베버는 병약한 아이로 태어날 때부터 좌골에 이상이 있었고 이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어린 베버에게는 놀라운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베버의 아버지는 그런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단이 공연을 위해 이동할 때마다 자식을 가르칠 선생을 찾았는데 마침내 잘츠부르크에서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버는 모차르트는 신처럼 존경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후 주위에서 그를 살리에리에게 지도를 받도록 권유했는데 베버는 펄쩍 뛰며 거부했습니다. 14세 때 베버는 최초의 오페라 <숲 속의 아가씨>를 작곡했고 <페터 슈몰과 그 이웃사람들>을 작곡하여 공연을 하였습니다. 1804년에 빈으로 간 베버는 당시 영향력을 떨치던 음악 선생 게오르그 요제프 포글러에게 음악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브레슬스라우의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감독으로서 개혁을 해나가는데 미숙했습니다. 단원들은 18세의 수석 지취자의 통제를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베버는 인쇄용 동판 제작에 쓰려던 초산을 와인으로 잘 못 알고 마시는 사고를 당했고 목소리를 망친 그는 결국 사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유망한 젊은이에게는 곧 고귀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습니다. 뷔르 템 베르크 공작부인의 시녀 덕분에 궁정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공작부인이 주도하는 사교계 안에서 베버는 썩 괜찮은 건반악기 작곡가로 명성을 키웠습니다. 자비로운 공작부인은 이 야망을 품은 스물한 살의 젊은이를 개인 비서를 찾던 친척에게 추천해주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을 베버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예술을 접소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루이스 폰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직속 하인이 되어 그의 집에 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친절한 관심에 힘입어 나는 <질바나>라는 오페라와 <최초의 소리> 서곡, 새로 개작한 합창, 건반악기 소품 등을 작곡했다."
1806년 뷔르 템 베르크의 오이겐 공작이 음악감독으로 임명하여 가까스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베버는 오이겐 공장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위해 교향곡 2곡을 작곡했습니다. 이두 작품은 매력적이고 창의력이 넘치는 작품이었지만 기존의 형식을 사용하는 등 베버의 후기 양식에 나타나는 낭만주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뷔르 템 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의 궁정에서 궁정의 비서로 그의 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에 그는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하여 빚도 많이 지게 되고 돈을 횡령한 사건에 연루돼서 한동안 감금생활을 한 뒤에 추방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한 주요 작품으로는 낭만적인 오페라 <질바나>와 수편의 가곡, 피아노 소품 등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만하임으로 온 베버는 영향력 있는 예술가 모임의 구성원들과 사귀었고 이곳에서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 및 기타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이론으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 뒤 다름슈타트로 옮겨간 그는 포글러를 다시 만났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도 만났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한 곡으로 피아노를 위한 <그랜드 협주곡 1번 C장조> 작품번호 11과 유쾌한 1막 오페라 <아부 하산>등이 있습니다. 다름슈타트에서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해 실의에 빠진 베버는 1811년에 뮌헨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클라리넷의 거장 하인리히 베르만과 사귀어 <콘체르티노> 외에도 현란하고 창의력 넘치는 클라리넷 협주곡 2곡을 작곡했습니다.
베버는 1813년에 전부터 사귀던 가수 카롤리네 브란트와 결혼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생일선물을 사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연인을 떠올리며 밤새도록 <무도회의 권유> 곡을 썼습니다. 베버는 오페라 제작의 모든 면들을 자신이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의 관례인 연주를 하면서 간간히 지휘를 하는 스타일을 깨고 현재와 같이 전면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며 지휘하는 최초의 지휘자로 기록됩니다. 이 시기에는 마지막 4개의 피아노 소나타들, 가곡, 유명한 <무도회의 권유>, <콘체르트슈튀크> 작품번호 79 등 피아노 독주 소품들을 작곡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1821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베버는 민속 전설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에서 애국심과 국민정신을 고양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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